그냥 그렇게 3

in SteemCoinPan •  2 months ago  (Edited)

1 잠이 오지 않는 불면의 날이 이어진다. 매일 새롭게 낯선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심지어 오늘은 몸 곳곳에 찌릿찌릿한 감각이 들 정도로 에너지를 쏟을 일이 있어 대상포진이 생길 것을 진지하게 걱정하게 되었다.

포진이 올 때마다 어떤 한 시기를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래서 오늘은 요즘의 나의 상태를 생각하며 포진이 와도 어쩔 수 없다고, 몸의 괴로움마저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생각으로 넓은 침대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2 이번 명절에는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지 못했다. 큰 지출이 많았고, 9월 레슨비를 보내지 않은 학생이 있고, 앞으로도 돈 들어갈 일이 많은 게 이유였다. 머쓱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는 계속 내게 용돈을 주려 했다. 나는 주지는 못해도 받지는 않겠다는 심정으로 한사코 거절했다.

3 아침엔 혼자 나와 스타벅스에 갔는데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운동화 깔창 아래 5만원씩 10만원을 넣어두었다고. 그것은 내가 어릴 때 아빠가 종종 비상금을 숨기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전화를 받고 또 엉엉 울었다.

4 오늘은 본가에 남아있는 짐 일부를 정리했다. 책장에 십 년 넘게 방치되어있던 악보를 전부 꺼내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훨씬 깨끗해져 진작 할 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5 책장에는 아빠가 젊은 시절 샀던 LP 몇 장이 남아 있었다. 호기심에 한 장 한 장 넘겨보다 조동진과 빌리 조엘의 LP를 찾게 되었다. 조동진과 빌리 조엘을 듣던 아빠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생각보다 꽤 근사한 청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 어제는 아빠가 시를 썼다. 가족의 사랑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것을 우연히 찾게 된 동생과 나, 엄마가 같이 읽게 되었는데, 모두가 울컥할 정도로 따뜻한 내용이었다.

7 오늘은 마음이 너무 지쳐 술에 취한 아빠를 잠깐 끌어 안고 있었다. 아빠는 내가 안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다른 이야기를 했다.


8 낮에는 오래 따르던 교수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독 나를 아끼던 교수님은 언젠가부터 나에게 유학이나 진학 같은 구체적인 앞날에 대해 묻지 않으셨다. 교수님과 함께하는 일마저 하지 않겠다 말한 후로는 가끔 내가 연주한 유튜브 영상을 보내는 게 전부였다. 그러는 와중 교수님은 서울대에 임용되셨고, 그 후로 나는 더욱 보이지 않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연락하기를 주저했다.

9 통화 중에 교수님은 내 근황을 물으셨다. 계속 얼버무리는 내게 정확히 하는 게 무엇이냐며 더 자세히 물으셨다. 그래서 결국은, "음악 쉬면서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어요."라고 소리 내 말해버렸다.

10 교수님은 잠깐 말을 멈추셨다. "그래. 잘했네. 니가 나보다 났다. 언제나 보고 싶은 우리 XX."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나는 전화를 끊기 전에 또, 울음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다.


11 지금까지 나를 둘러싼 인간관계는 대부분 '나아가기 위함'을 전제로 했던 것 같다. 아니라고 해도 보이지 않게 그런 압박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만을 위한 관계를 맺고 싶다고 생각했다.

12 오롯이 사랑받기. 나로서 사랑받기. 내가 어디에 있건, 어떤 모습이건,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나로서 바로 서기. 그리고, 내가 받은 그대로 당신과 세상을 사랑하기.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ort Order:  

내면의 평화와 행복이 항상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나루님.

힘들 때면 이 댓글을 꺼내볼게요. 감사합니다!

제가 대학4학년때 운전면허를 땄는데요.
보통은 젊은강사가 연습을 시켜주는데, 어느날인가 할아버지비슷한 분이 하시는거에요.
끝나고 차에서 내리는데 그분이 "몇번 안했다고 아는데 잘하네."하는 거에요.
제 대답은 "잘하긴 뭘 잘해요. 더 잘해야 하는데.." 입을 삐죽거리면서 그랬을거에요.
"칭찬을 하면 받을 줄 알아야지."

그 당시 저는 다른 사람이 하능 이야기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던거죠. 요즘은 그 때 생각만 하면 피식~ 웃음이 나와요. 참 그렇게 내 생각에만 빠져 살았구나..

주변에 사랑을 주려는 사람이 많네요. 그 사랑, 그냥 그대로 받으세요. 이런 저런 생각은 금물. 그냥 주는대로.. ^^ 있는 그대로 받을 수 있는만큼. 그러다보면 더 많이 받을 수 있어요...

잔소리로 들리지 않을지 살짝 걱정이 되지만, 그냥 냅둘래요. 좋은 추석연휴 보내길 바랍니다. ^^

명절 잘 보내셨어요? 어제 부모님 밭에서 이 댓글 보고 뭉클했어요. 사랑을 제대로 받아본 적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랑만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네요. 서울 오실 일 있으면 연락주세요. 20세기 소년에서 뵈어요 :)

네. 저도 20세기 소년에 가보고 싶었어요. 가게되면 미리 알려드릴께요.^^

남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은 것은 그 자체로 기적과 행운입니다. 행운아는 그만큼 뭔가 잣지 않으면 행운이 아쉬워하지 않을까요?

저도 보이지 않는 의심들이 있었을 거에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들로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어왔다고 생각해요. 잣지는 무슨 오타일까요 궁금하네요. 제가 행운아라니 감사합니다!

실을 잣다 요...

모르는 말이야...

자아내다

차치하다

@ab7b13 transfered 0.7 KRWP to @krwp.burn. voting percent : 0.96%, voting power : 56.80%, steem power : 1845966.24, STU KRW : 1200.
@ab7b13 staking status : 130.006 KRWP
@ab7b13 limit for KRWP voting service : 0.13 KRWP (rate : 0.001)
What you sent : 0.7 KRWP
Refund balance : 0.57 KRWP [57484527 - 0e7faf7e20e1bb0fcf34952d015495fae0c0fe3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