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렇게 2

in SteemCoinPan •  2 months ago  (Edited)

1 어제는 부모님과 밭에 다녀왔다. 나는 부모님의 밭을 좋아하지 않고, 노동도 싫어 보통은 밭에 갈 때면 멀뚱멀뚱 쳐다보거나 조용히 사라지는 편이다. 그런데 어제는 이 많은 일을 노쇠한 부모님 두 분이 해왔다는 사실이 죄송해 옷까지 갈아입고 열심히 고추를 땄다.

2 작업이 마무리될 때쯤은 서서히 해가 질 무렵이었는데 일이 고되게 느껴져 음악을 틀었다. 문득 평소 좋아하는 Fleet Foxes의 앨범 Fleet Foxes가 떠올랐다. 그 앨범을 트는 순간 빽빽한 고추밭과 빨간 고추, 하우스 사이로 새어드는 가을볕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꼈다.

3 Fleet Foxes를 들으며 붉게 익은 고추를 땄던 일은 이번 가을 가장 멋진 일이 될 것 같다. 같은 공간에서 고추를 따던 가족들이 나에게 노래를 끄라고 하지 않아 줘서, 긴 트랙의 앨범을 함께 들어줘서, 그것만으로 사랑받는다 느낄 정도로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4 저녁에는 삼촌과 이모와 함께 식사하게 되었다.

5 오랜만에 만난 삼촌은 듣고 싶지 않은 여러 말을 했다. 나는 그 기저에 묻어있을 삼촌의 사랑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이해하려 했지만, 그와 반대로 계속 마음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6 그 사실을 눈치챈 동생은 삼촌 가까이에 있던 나와 자리를 바꿔주며 나 대신 가벼운 농담으로 삼촌을 상대했고, 아빠는 삼촌의 말이 심해진다고 느껴질 때마다 삼촌을 다그쳤다.

7 덕분에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의 식사 자리는 원만히 마무리되었다.


8 오늘 아침에 생각해보니 삼촌이 했던 말들은 언젠가 내가 가족에게서 들은 적 있는 말들이었다. 그 말을 하던 이들을 바꾼 건 무엇일까. 언제부턴가 가족들은 내게 바라는 것이 없고, 행복하게만 지내라고 한다.


9 나를 모르는 사람이 팔로워인 인스타 계정에서 글 쓰는 것에 몰입하던 때가 있다. 몇몇 지인에게만 그 계정을 알려줬었다. 한참 뒤에 그 계정을 알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의 사고방식에 대한 화두가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10 그 또한 사랑에서 기반했음을 나는 안다. 그 시기 나는 바깥에 나가는 일도 없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친구는 나의 자책하는 사고와 그와 연결되어있을 우울증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나온 곳은 몸과 마음이 망가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나를 걱정하는 모임이었다. 친구의 마음을 잘 알지만, 아직도 나는 글을 쓸 때면 나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한 번씩 의심하게 된다.


11 어쩌면 그때, 그 친구에게 내게 어떤 문제가 있냐 묻는 게 나았을 수도 있다. 엉엉 울며 그런 게 아니라며 자존심을 내세웠을 수도 있다. 뭘 아냐고 화를 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까지 그 말을 떠올리는 일은 없을 수도 있다. 물론 답은 없겠지만.

12 그래서 요즘은 조금씩 말해보려 한다. 순간순간 느끼는 솔직한 감정들, 나에게 와닿는 불편한 감정들에 대해서.

13 14 15 오로지 사랑만 할 순 없는지. 그 말이 터무니없다 하더라도, 사랑만 하며 살기에도 충분히 버거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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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가족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불편한 경우가 많이 있는것 같아요.
안부를 묻는다는 미명하에...
성공의 기준중에 하나가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고 싫어하는 사람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거더군요.
물론 성공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지만요.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나루님!!^^

ㅎㅎ 원치 않는 인간 관계를 거의 끊어냈지만, 가족은 예외라 어떻게든 친하게 지내려 노력중이에요. 정말 어려워요. 그만큼 가장 큰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포근하고 행복한 명절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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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은 모르지만 이 글에서 ab7님의 젊은 날들이 어뗐을지 조금 짐작이 돼요.
놀라운 건 절대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거죠.
부모님의 농사를 도우려 하셨다는 것만 봐도. ㅎㅎ

어떤 젊은 날을 짐작하셨고, 어떤 면이 절대 변하지 않았을지 궁금해요. 집안일 하나도 안 하는 못된 딸입니다. 그냥 그날 하루 한 거에요. ㅋㅋ 힘찬 목요일 보내세요!

이거 그림조아요. 네덜란드 속담들을 모아서 그림으로 완성한 거드래요. 넘나 재밌다.

https://mymodernmet.com/dutch-proverbs-pieter-bruegel/

기존 그림으로 앨범 아트 했다는 인터뷰를 보긴 했는데... 보내주신 링크는 조금 보다 말았어요. 언제쯤 오실 예정이세요? 혹시나 이번 주엔 못갈지도 몰라서요.

당장에는 아니고요. 가게되면 미리 물어볼께욤.

얼른 보고 싶지만, 편할 때 알려주세요!

왜 하필 고추밭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