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드라이브

in SteemCoinPan •  last month 

언제부턴가 본가에 내려올 때면 엄마와 새벽 시장에 가서 장을 보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일찍 일어나 멀뚱거리는 나를 데려갔던 게 시작이었던 듯한데, 그 후로 장보는 일엔 관심이 없지만 엄마와 둘이 있는 시간이 싫지 않아 종종 따라나서곤 했다.

오늘은 새벽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글을 쓰려던 찰나에 엄마가 시장에 가자는 말을 꺼냈다. 잠깐 고민했지만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섰다.


시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엄마는 내게 살짝 팔짱을 꼈다. 엄마도 나와 둘이서 이야기하는 이 시간이 좋아 시장을 좋아하지 않는 나를 부러 데려가려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 팔짱을 풀고 엄마 뒤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살 게 없어 금방 장을 보고 차로 돌아왔다.

엄마는 이모 줄 음식을 싸 왔다며 나온 김에 이모 집에 들렀다 가자고 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이모와의 만남이 걱정됐다. 이모는 유독 나를 예뻐하셨다. 작년에 시작한 유튜브도 누구보다 열심히 챙겨보며 응원의 연락을 남기곤 했는데, 돌연 유튜브를 그만둔 것도, 마음이 담긴 카톡에 답장하지 않은 것도 전부 미안함으로 남아 있었다.


이모 집으로 가는 길에는 그간의 근황을 얘기했다. 새로 생긴 친구들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기뻐했다. 무엇보다도 밖에 나갈 일이 생겨 좋다고 말했다. 엄마는 내가 일을 줄이기 시작한 이후로 계속 내가 히키코모리가 될 것을 걱정한다. 엄마가 내 친구들을 좋아해주니 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이모는 주차장에 미리 내려와 있었다. 나는 머쓱한 마음에 눈도 못 쳐다보고 있었다. 이모가 날 보고 웃길래 나도 이모를 보고 웃었다. 몇 초쯤 정적이 이어지다 이모는 "살만해? 잘 살아"라고 말했다. 그 순간 마음이 무너짐을 느꼈다. 이모가 내게 바라는 것은 단지 '살아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들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이모의 사랑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모와의 만남이 내 안에서 어떤 파문을 일으켰다. 스타벅스로 가는 길에는 용기를 내 엄마에게 말을 꺼냈다. "엄마 그 방 기억나? 큰 방이었는데 한쪽 면이 전부 장롱으로 되어있던 집 있잖아. 나 어릴 때." 그 말을 꺼내기 시작함과 동시에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이 마구 났다. 엄마는 당황한 듯 보였다.

잊혀지지 않는 오랜 기억을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그때 그 기억이 잊혀지지 않아." 엄마는 기억 못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너에게 화풀이한 것도 미안하다고 했다. "이해할 순 있지만 그게 내게 상처가 됐었어." 나는 조수석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스타벅스에 도착했다. 내가 사주겠다며 들리자고 한 것이었는데, 엄마는 자기가 사겠다며 허둥댔다.

그래. 엄마가 잘못했으니까 엄마가 사줘.

이 말을 하고 무척 놀랐다. 이런 말을 엄마에게 해본 적이 없다. 내 안에 아직 아이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화해의 바닐라 더블샷을 마시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엄마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 기억을 나누며 내가 생각보다 훨씬 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몇 개의 나쁜 기억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을 뿐...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기 전 엄마를 꽉 끌어안았다. 엄마는 내게 "앞으로 더 많이 사랑해줄게"라고 말했고 나는 엉엉 울었다.

그것만으로, 잊혀지지 않을 것 같던 오랜 기억이 흐릿해짐을 느꼈다. 행복해지기. 오롯이 더 행복하기만 하기.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ort Order:  

@ab7b13 transfered 0.7 KRWP to @krwp.burn. voting percent : 0.93%, voting power : 55.88%, steem power : 1844033.35, STU KRW : 1200.
@ab7b13 staking status : 127.006 KRWP
@ab7b13 limit for KRWP voting service : 0.127 KRWP (rate : 0.001)
What you sent : 0.7 KRWP
Refund balance : 0.573 KRWP [57373788 - dee177aed518449db375bfdffb3c5a5656e1fc41]

하나씩 그렇게 녹여내세요. 하나씩.. 하나씩.. 응원합니다.

녹여낸다는 표현이 좋네요. 침전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해보려구요. 따뜻한 명절 보내세요!

그 때, 그 당시의 부모님도 지금 돌이켜보면 100% 완벽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음을 인정하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요. 지금의/앞으로 나이들 우리들이 그렇듯이요. 그리고 현재를 응원합니다. :)

그런 상황에서도 나를 이만큼이나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하면 감사하지만, 그래도 그 기억들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부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응원 감사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거의 초임인 영어선생님이 계셨는데, 심지어 중학교 1학년인 제가 보기에도(아니, 나는 중학교 1학년 수준이 아닌가?) 벅차하고 아이들을 어쩔 줄 모르며 감정을 어찌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선생님이 저에게 큰 상처를 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렇다는 것을 알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별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며, 결과 지금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훨씬 노련하고 실수가 적었을지라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수점식 위로에요. 제겐 정말 위로가 되구요. ㅋㅋ 오늘 즐거운 시간 보내고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