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록자] 스무 살의 나에게 열아홉의 내가 주었던 첫 선물 #2 – 태국, 치앙마이

in SteemCoinPan •  3 months ago  (Edited)

스무 살의 감정은 특별하고 소중합니다. 정해진 세상이 아닌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시작점이기 때문이죠. 수많은 경험 속에 흔들리고 또 흔들리면서 스스로를 알아가는 시간. 그런 의미에서 여행과 스무 살은 뭔가 잘 맞는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청춘의 태국 여행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스무 살의 나에게 열아홉의 내가 주었던 첫 선물 #2 – 태국, 치앙마이


  • 글 / 사진 : 박진희, 편집 : 여행기록자

05 길


치앙마이는 인도와 도로가 제대로 구분돼 있지 않다. 신호등도 많은 편이 아니라서, 길을 건널 때면 도로가 한적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럴 때면 늘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곤 한다.

이곳에는 스쿠터가 아주 많다. 교복을 입은 앳되어 보이는 아이들도 스쿠터에 앉아 등교를 한다. 조금 더 있다 보면 차 문이 없는 빨간 썽태우가 흔들거리며 지나가고, 탑승감이 제법 좋아 보이는 툭툭도 그 뒤를 따라 지나간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는 개들이 반쯤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다. 동그란 눈을 뜬 작은 고양이들은 내가 다가가도 멀뚱멀뚱 쳐다볼 뿐, 도망가지 않는다.

눈에 띄는 색의 옷을 입은 어린 승려들은 옹기종기 모여 사원 마당을 청소하고 있고, 배구 경기가 한창인 학교에서는 까르륵대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5분이 지나도 길을 건너지 않았다. 멀뚱히 서서 이 모든 순간을 느껴본다. 기분 좋은 게으름, 혼자 즐기는 간만의 여유. 한참을 서서 게으름을 만끽한 뒤 슬슬 발걸음을 떼어본다. 또 어떤 거리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06 만남





오후 다섯 시, 날씨가 조금씩 선선해지기 시작할 시간이다. 별다른 목적지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걸어 다니기만 하니 배가 고팠다. 마침 근처에 적당한 식당이 보여서 들어갔는데,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들 일행이 있어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혼자 들어가서 주문해도 되는 걸까, 괜한 생각이 들어 머뭇거렸다.

우스웠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러 치앙마이까지 온 건데,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먹고 음식점 주변만 뱅글뱅글 도는 꼴이라니. 사실 한국과 다른 것도 없었다. 나는 왜 그렇게 머뭇거렸던 걸까.

숙소 앞의 세븐일레븐. 한국과는 또 다른 매력의 편의점 음식들


한껏 소심해진 나는 가까운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탄산음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작정 여행을 저질렀던 용기에 취해 있던 나였다. 그런데 너무 쉽게 자신감을 잃었다. 음료수를 들고 호스텔 로비로 향했다. 창밖을 보며 멍이나 실컷 때리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그런데 창가와 붙어있는 높은 테이블 자리는 이미 누군가 자리를 차지했다. 어쩔 수 없이 그 뒤에 있는 낮고 넓은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음료수를 마시며 내 자리를 빼앗은(?) 그를 몰래 쳐다봤다.

‘검은 머리를 가진 저 동양인 남자는 한국 사람일까?
나처럼 혼자 온 것 같은데, 저녁은 먹었냐고 한 번 물어볼까?
그렇게 하면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렇게 망설이던 사이에 그는 옆에 있던 작은 가방을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연이 닿을 수도 있었던 사람을 그냥 보내는 것 같아서 괜히 아쉽고 초조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소심함 때문에 태연한 척, 낙서 가득한 벽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속은 애가 탔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던지는 간단한 질문 하나.

“Where are you from?”


낙서들이 가득한 호스텔의 벽. 다양한 언어들이 뒤섞여 있다


07 Ride


스쿠터 뒷자리에 앉아있으면 달려오는 바람과 나의 코끝이 부딪힌다. 스쳐 가는 치앙마이의 숨결이 살갑다. 그보다는 느리게 지나가는 풍경들과 눈을 맞춘다. 내가 이곳을 떠나더라도 나를 기억해줄까?

잠시 스쿠터가 멈춘다. 거리의 포장마차 주인과 인사를 나눈다. 그저 미소 만이지만 우리는 이미 서로가 반가웠다. 스쿠터가 다시 움직인다. 나는 손을 커다랗게 흔들며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두 손바닥이 점점 멀어진다. 내가 이 거리로 다시 돌아올 때는 우리 악수라도 하는 게 어때요?

자유롭게 치앙마이 거리를 누비는 스쿠터, 그 위에 앉아있는 우리들. 이런 게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냐는 말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바람이 코끝으로 스친다. 치앙마이가 느껴졌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도 더 선명하고 또렷했고 기분 좋은 촉감이다. 분명 지금 이 모든 순간이 꿈처럼 기억될 거라는 말에 나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을 지금 보다 더 완벽하게 떠올릴 수는 없을 테니까.

치앙마이 도로 위에 소중한 기억 한 조각을 숨겨뒀다.


08 North Gate




“재즈 바에 가보고 싶어요!”

가보고 싶은 곳이 있냐는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여기만큼은 꼭 가겠다고 점 찍어뒀던 곳. 치앙마이의 North Gate Jazz Co-op.

‘하늘이 완벽하게 어두워질 즈음 맥주 한 잔을 시켜 테이블 위에 올려둘 거야. 바 안은 재즈로 가득 차 있겠지. 그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맥주를 마실 거야. 이곳이 치앙마이라는 걸 마음껏 느낄 수 있게’, 라고 다짐했던 곳.

밤 아홉 시 정도면 공연이 시작될 거라는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맥주잔을 올려둘 테이블은커녕, 앉을 의자 하나조차 찾기가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재즈 바의 바깥에 서서 음악을 감상했다.

밴드는 서로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연주를 이어갔다. 객석의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자유롭게 리듬을 타며 까딱거린다. 재즈 바의 안이 훤히 보인다. 안이 아니라 바깥쪽에 서 있었기에 한눈에 담을 수 있었던 모습들. 이렇게 보니 이 자리도 나쁘지만은 않다.

나는 이곳의 붉은 벽지도 마음에 들었다. 따스한 여름밤의 공기와 분위기가 따뜻한 온도를 가진 색의 벽지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모두 다른 곳에서 왔지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들으며 나란히 어깨춤을 춘다. 음악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시작할 때면 다들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이다. 누군가는 그 두근거림을 기대하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아보기도 한다. 음악의 끝에는 다 같이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낸다.

“나중에 맥주 마시러 갈까요?”
“완전 좋아요!“

입이 귀에 걸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아무리 평범한 질문이라도 이곳에서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작지만 시원한 바람이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소소하지만 완벽한 나의 한여름 밤.

09 Cheap thrills



ZOE IN YELLOW. 밤이 찾아오면 발걸음이 이곳으로 향하게 된다


Sia의 노래가 들려오는 길을 따라 걷다가 처음 보는 바에 도착했다. 설레었다.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음주가 막 허락되기 시작한 스물이니까. 게다가 해외에서 마시는 첫술!

어차피 다 똑같은 알코올인데,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어?, 라고 생각했지만 받아 든 메뉴판에서 익숙한 이름이라고는 보드카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What’s your favorite?”

직원의 귀를 빌려 조심스럽게 건넸던 나의 질문.

“umm… It’s my favorite.”

그는 손가락으로 보드카가 들어간 칵테일을 가리켰다. 안타깝게도 나는 보드카를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다. 걱정 반, 기대 반. 마른 침을 몰래 삼킨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주문했다. 이왕 추천받은 거 한번 시켜보자는 마음으로 태연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그럼 이걸로 주세요”

“이게 여기서 제일 잘 나가는 거래?”
“아니, 저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거라고 해서 주문했어.”

그렇게 주문하면 어떡하냐는 구박을 받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첫 주문을 마쳤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던 거 같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을 보며 킥킥 웃었다.

알 수 없는 보드카가 나왔다. 아니나
b 다를까 술맛이 진했다. 고개를 좌우로 젓다가 결국 맞은편에 있던 콜라 향이 진한 레몬 칵테일만 홀짝홀짝 마셔댔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며 몇 잔을 비웠다. 확실히 기분이 좋아진다. ‘한잔 더’라는 주문을 몇 번이나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두 볼이 봉숭아 물 들 듯 발그레해졌다.

“나 취했나 봐. 자꾸 테이블에 엎드려.”

하지만 아무렴 어때. 모두가 여기서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걸.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 나는 그저 술이 마시고 싶다면 술을 마시면 되는 거고, 춤을 추고 싶다면 춤을 추면 되는 거야.

‘단돈’이라는 값을 주고 목 뒤로 넘기는 알싸한 칵테일. 겨우 이 정도 돈으로 이렇게나 행복해도 되는 거야? 나 사실은 말이야, 나중엔 기억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작은 수다들조차도 너무 즐거워서 당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10 The Night


“그거 알아요? 여기, 밤에는 커다랗고 사나운 들개들이 돌아다닌대요.”

이런 얘기를 들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말이다. 물론 그때는 해가 떠 있을 때였다. 치앙마이의 밤이 이렇게 무서운 줄은 몰랐다. 가로등 개수는 한국의 절반만큼이나 적어서 까마득하게 어둡다. 가뜩이나 무서워 죽겠는데 하필 이 거리에는 개미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는다.

겁쟁이 of 겁쟁이였던 나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들개를 경계해야 했다. 당당하게 펴고 거닐던 어깨는 잔뜩 움츠렸고, 온몸의 털끝이 바짝 서 있다. 눈동자도 제 마음대로 굴러다닌다.

“악! 방금 뭔가 지나가지 않았어?”

옆에 있던 그의 팔을 붙잡으며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쥐가 지나갔을 뿐이라고 웃었지만, 사실 쥐 역시 질색이다.

나는 매일 인적이 드물어진 밤거리를 지날 때마다 작은 소리에도 몇 번이나 깜짝깜짝 놀라야 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이 밤거리를 두고 돌아가는 게 아쉬워 늦장을 부렸다.

“무서운 거랑 좋아하는 건 별개라니까. 정말이거든.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 거리가 너무 좋으니까.”

까마득한 어둠이 드리운 데다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아 무서운 길. 하지만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만 있는 것처럼 걸어다니는 건 참 좋다.

11 Every Morning




낯선 곳에서 청하는 잠은 늘 깊이 빠져들 수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난 거의 새벽 4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잠에서 깨었을 땐 아침 6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잠을 다시 청하는 건 빠르게 포기했다.

문득 이곳의 이른 아침이 궁금해졌다. 어떤 바람이 불고 어떤 공기가 와 닿을지. 이 호기심을 해소하지 않으면 미련이 남을 게 뻔했다. 나는 재빨리 샤워실로 들어가 씻고 머리를 묶은 뒤, 무작정 아침 산책을 나섰다.

도로 위는 평소와는 달리 거짓말처럼 한적했다. 낮과 밤에는 구경할 수 없었던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맨다리와 맨 팔에 닿아 전해지놓여있는 커다란 분수대를 바라본다. 느긋한 아침에 스스로에게 준 작은 숙제.



내가 행복한 이유는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다. 플레이리스트에서 랜덤 재생을 눌렸을 때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는 일처럼 우연하고 소소한 기적들이다.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행복한 게 아니다. 작은 일에도 매일 기뻐하는 것. 그것이 전부지만, 우리는 그런 작은 것들이 채워진 매일을 살아간다.

http://travelwriter.kr/asia/1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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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거리 사진을 보니 추억이 떠오르네요
태국. 정말 즐거웠던 기억이 남아있는데
제 기억으로는 90년대 한국의 밤거리가 생각났습니다.
그시절에 봤던 드라마에서만 봤던
미국문화와 한국의 문화가 섞이는 그런 느낌이었는데
오늘 사진에는 그런 사진이 나오지는 않아서 아쉽네요

그래도 칵테일 드셨다는 바의 분위기가 조금 비슷하달까요?